파스빈더 영화의 세계
알렉산더 클루게, 빔 벤더스, 베르너 헤르초크 등과 함께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다가 1982년 37세로 요절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뮌헨의 한 전위 극단에서 연극 배우로 출발한 파스빈더는 '전후 모든 독일 영화인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정도로 선구자였다.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틀 속에서 서독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루는 한편, 독일 현대사를 정면으로 탐구해 크게 주목받았다. 1969년 자신의 극단 멤버들과 함께 장편 극화를 찍기 시작해 죽기 전까지 그는 불과 13년 동안 4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든 다작가였다. 동성연애자, 외국인 노동자, 창녀 등 주로 소외 계층들이 그의 영화에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이 책은 영국의 문화사가인 로날드 헤이먼이 파스빈더의 영화 활동을 그의 사생활에 따라 추적한 일종의 평전이자 작가론이다. 헤이먼은 주변 인물과의 인터뷰, 파스빈더에 관한 기록 등을 샅샅이 뒤져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다. 파스빈더에게 있어 영화란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도구로 자신의 삶 자체를 표현한 것이다. 그의 삶이란 부성애의 결핍, 동성애로 인한 실연과 좌절, 마약과 폭음,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몰두한 촬영 작업이 전부이다. 그런 파스빈더의 삶의 소산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페트라 폰 칸트의 비통한 눈물>,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로니카 포스> 등을 비롯한 그의 영화는 일관되게 성적 관계를 매개로 권력과 억압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즉 그는 연인간의, 가족간의, 친구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여 그 주제를 다루는 데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삶과 예술을 하나로 만든 천재의 광기를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동성애와 사디즘이란 낯선 요소가 예술의 한 수단이 될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 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한 작품과 생애의 유기적 연관성을 통해 한 영화 감독의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작가론적 접근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뒤에 나오는 영화학자 로버트 필 콜커의 '파스빈더와 뉴 저먼 시네마'와 메리 베스 하랄로비치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 나타난 성의 정치학'은 파스빈더의 영화 세계를 좀더 깊이 아는데 도움을 준다.


* Ronald Hayman, Fassbinder: film maker (Simon & Schuster, 1984).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

1945년 독일의 바트 뵈리쇼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67년 전위 극단인 액션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시작한다. 그는 극작, 연출, 연기에서 곧 탁월함을 인정받았고 1968년에는 안티테아터를 창단한다. 1969년부터 그는 자신의 극단 단원들과 함께 아주 적은 예산으로 장편 극화를 찍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들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서독 정부 및 공공 단체로부터의 지원금을 충분히 얻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좀더 상업 / 대중 영화에 가까운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고 1970년에서 1977년 사이에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틀 속에서 서독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다룬 일련의 영화들을 놀라운 속로로 만들어 냈다. 1982년 37세로 요절하기까지 그는 13년 동안의 영화 경력을 통틀어 무려 39편의 장편 영화를 감독하였다. 또한 연극 활동도 계속하였고, 자신이 감독한 영화의 각본을 대부분 썼으며, 그 중 10여 편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초기작들로부터 이 시기까지 파스빈더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 계층, 혹은 '타자 other'라는 점이다. 뒷골목의 깡패들, 동성 연애자, 외국인 노동자, 창녀, 노인 등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의 영화들의 줄거리를 이룬다. 그는 멜로드라마(주로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빌려 온)의 내러티브 속에 이러한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이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사회 체제와 맺는 관계들을 일상적인 사건의 배열로 보여 준다. 대사는 지극히 평이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연기 또한 무표정한 것이 보통이다.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브레히트적인 --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대신 지적인 '작업'으로서 영화를 보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 태도의 결합이라고 부를 만한 파스빈더 영화의 이러한 특징들은 특히 ＜사계절의 상인＞(1971), ＜페트라 폰 칸트의 비통한 눈물＞(1972),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3),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원할 뿐＞(1976), ＜절망＞(1977) 등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파스빈더는 개인, 가정의 이야기만을 미시적으로 다루던 시각을 넓혀 독일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영화 속에서 탐구하는 시도를 계속했다. 대작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1980; 상영시간 16시간의 14부작)을 비롯하여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8), ＜릴리 마를렌＞(1980), ＜베로니카 포스＞(1982)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파스빈더는 파시즘이 일어서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나치 시대, 전후의 미국 점령기와 '라인 강의 기적'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독일 사회를 이 영화들 속에서 차갑게 묘사해 간다.

이러한 그의 변모는 그가 초기작으로부터 일관되게 추구해 온 '권력과 억압'이라는 주제로부터 충분히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스빈더는 '사랑(연인간의, 가족간의, 친구간의)'을 소재로 하여 그 주제를 다루는 데 놀라운 솜씨를 보였으며, '일상 생활의 파시즘' 묘사에서 '파시즘의 역사적 뿌리' 탐구로 나아간 것이 그의 영화 세계의 전개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서울: 한울, 1991, p.51 참조).